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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아쓰코의 이탈리아 생활을 그린 에세이 3권을 연달아 읽었다. 이번 책에는 전의 <밀라노 안개의 풍경>,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에 비해 자신의 개인적 삶과 경험, 그에 대한 소회가 많이 드러나 있다. 너무도 담담하게 혹은 늠름하게 지난 삶을 서술하고 있던 자세가 이번 작품에서는 느슨해진다. 귀국하고, 세월이 흐르고, 아픈 시대의 경험을 앞서의 2권에 자제하여 풀어놓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직면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앞서서 담담하게 서술한 남편 페피노의 죽음 관련한 이야기와 자신의 감정을 이번 책에서는 자세히 서술한다.제목 그대로 밀라노와 코르시아 서점 이야기를 주로 다루던 앞서 2권과 달리, 이번 <베네치아의 종소리>는 베네치아의 경험을 주로 다루지 않는다. 베네치아에서 종소리를 듣고 일본에 계신아버지의 삶을 떠올리고,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한다.아비뇽 여행 중 마드리갈을 악기에 맞춰 부르는 젊은 남녀. 분수 광장 지나다가 마법처럼 눈 앞에 펼쳐진 광경과 그것을 감싸는 음악이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불러왔다.- 본문 14쪽에서 인용이렇듯, 어떤 경험을 매개로 얽힌 개인적 기억을 떠올리기에 이번 책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체험을 회상한 내용이 많다. 아버지의 외도, 전쟁시 피신 생활과 큰이모 가족, 자신의 방황 등등.아버지가 없어진 뒤로 내게 부모란 응석을 부리는 대상이 아니라 받아주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134쪽에서 인용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무을 계속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55쪽에서 인용위 인용부분을 보면, 반백년 전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여성으로서 딸로서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며 혹은 배신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탈리아에서 만난 카티아 뮐러를 회상하며 카티아는 그녀 나름의 길을 선택해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234쪽) 라고 서술한 것을 보니, 이 에세이를 쓸 즈음 노년이 된 저자는 친구 카티아는 물론, 나름 자신의 지난 삶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 같다.참, 그동안 스가 아쓰코의 이탈리아 생활을 그린 책 세 권을 읽으며, 1960년대까지 건재한 밀라노의 중세성이 나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아래 문장을 읽으니, 그래서 저자는 더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간만 다른 곳이 아니라 시간까지 다른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니 말이다.아, 중세와 이어져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나 자신이 큰 파도에 휩쓸려 키가 부서져버린 조각배같이 느껴졌다. 이곳 서양의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고국의 현재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나는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할까.- 14쪽에서 인용
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

일본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시행착오로 가득했던 유학 초기에서 예순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현재까지, 인생의 한 시기 찾아왔다가 사라져간 사람과 장소들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에세이. 학회 참석을 위해 향한 베네치아의 호텔에서 아련한 종소리와 오페라의 선율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베네치아의 종소리」, 전쟁의 상흔이 남은 가톨릭계 기숙학교에서의 추억을 재치 있고 생생하게 그려낸 「기숙학교」, 첫 유학지인 파리의 기숙사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와 삼십 년 만에 재회하는 「카티아가 걷던 길」, 병상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등, 총 열두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스가 아쓰코의 작품 중에서도 구성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책 전체에 감도는 애수 어린 분위기와 함께 가족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갑자기 나 자신이 큰 파도에 키가 휩쓸린 조각배같이 느껴졌다. 이곳에 존재하는 서양의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고국의 현재에도 수용되지 못하는 나는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할까. 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에는 사방에 두꺼운 벽만 가로놓인 기분이라, 그저 몸을 움츠리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_본문에서

스가 아쓰코는 예순한 살로 문단에 등장할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작가였다. 그리고 불과 팔 년 사이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며 주옥같은 작품세계를 일구어냈다. 유럽과 일본에서의 시간을 부드러운 실로 자유롭게, 동시에 면밀하게 엮어낸 이 책은 ‘잃어버린 시간’과의 융화이자 인생에서 지나쳐간 사람들에게 내미는 화해의 제스처다. 또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그려낸 뛰어난 교양소설이기도 하다. _세키가와 나쓰오(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