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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등에 베이다

jait 2021. 1. 23. 13:26

책등에 베이다

1 나는 요즘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좋은 문장을 보면 그 문장을 쓴 사람이 부럽고, 좋은 영화를 보면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부럽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 부럽다. 어느 작품으로부터 그냥 감동받고 끝내면 되는데, 자꾸 그 뒤에 있는 사람을 지독하게 의식한다. 부럽다는 말은 좀 가식적일 수 있다. 실은 아랫 입술이 비죽 삐져나올 정도로, 질투난다. 타인을 향한 조금은 삐딱한 시선. 그 시선은 남에게도 그렇고 나 자신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미운 시선이다. 분명 나보다 괜찮은 환경이었을 거야.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사람-그것이 타인이든 자신이든-을 만났을 행운, 그리고 밀도있고 건강한 사색을 촉진할 수 있을만큼의 비운까지 적절하게 배합된 그런 기가 막히는 환경. 결국 이러한 질투의 칼날은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넌 왜 그러니. 행운은커녕 비운마저도 보잘 것 없니. 나는 튀어나온 입술을 이내 깨문다. 이젠 무언가가 되야하지 않을까. 나의 아랫입술은 튀어나오기와 깨물리기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솔직히 말해야한다. 나는 이 책을 쓴 작가 이로 라는 남자를 질투하고 있음을. 내가 지향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땐 반가움이 반짝했다가도 이내 두려움이 따라온다. 아직 나는 시작도 못했는데 누군가는 이미 시작했고, 그 과정을 걷고 있고,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시작도 못했는데. 2 내가 늘 관심을 갖는 일은 책 이야기 를 재밌게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직업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어떤 일거리들을 하고 싶은 마음은 소란스러울 정도다. 예를 들면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책과 얽힌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하기.... 차라리 그냥 이야기하기 를 좋아해서 작가를 목표로 하던가, 아니면 이야기 전하기 를 좋아해서 출판편집인을 목표로 하던가 했다면 조금은 숨통이 틔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남의 이야기를 읽고 거기에 내 생각을 뭉게뭉게 풀칠하는 일-바로 그 일 자체-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열혈 독자 정도 나도 대학 졸업반이 되다보니 머릿속에 진로 생각이 가장 크다. 내 능력을 시장에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먼저 떠오르는 게 어찌보면 순리에 맞다. 물론 주위를 둘러보면 일단은 잡다한 능력들을 주섬주섬 쌓아서 그 능력들을 이용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아무래도 순서가 바뀐 것 같으니까. 어쨌든 자본의 관점에서 놓고 보자면 독자 는 소비의 주체, 생산자의 타켓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독자 는 돈을 벌 수 없다. 알량한 서평 몇 개로 책 몇 권씩 정도는 탈 수 있겠지만 직업인 선상에 놓기엔 무리다. 사람들은 독자 이야기 보다는 작가 이야기 를 더 듣고 싶어하고, 신간을 홍보하고자 서평 사업에 주력하는 출판사의 전략 말고는 딱히 이렇다할 수요도 없는 것이 독자 이야기 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의 현주소가 이렇다보니 그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상상 밖 어딘가에서 이토록 애매한 독자 이야기 를 여러 형태로 풀어서 먹고 살고, 기어코 열혈 독자 라는 직업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당연히 반가움 이었다. 작가와 독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다니는 삶을 은밀하게 꿈꿨기에 책 이라는 완성된 형태로 그를 만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커다란 안도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는 그를 스쳐갔던 책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곳곳에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를 심어놓았다. 나는 그 은유적인 단서들을 포착하면서 그의 삶의 조각들을 요리조리 맞춰 보았다. 빠진 조각들은 상상으로 채워보면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을 읽었고, 점점 텍스트 너머의 삶에 갈증을 느끼고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텍스트와 멀어진 거리만큼 사람과 사람이 드러난다. 결국엔 나 라는 사람에까지 오게된다. 바로 이 점이 독자 이야기 가 재밌는 이유가 아닐까. 그는 아내와 함께 서울에서 작은 독립출판물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에서 책 좀 읽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서점으로 알고 있다. 책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면 오히려 책과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늘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서점 주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서점 주인인 저자의 삶을 읽으면서 거기에 내 멋대로 상상을 덧붙여가다보니 어느새 서점 주인이라는 직업이 머릿속에서 꽤 근사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도 서점에서 종종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이제서야 서점 주인의 삶이 눈에 들어왔음은 아무래도 저자의 매력적인 글솜씨 때문일 것이다. 서점 주인은 단순한 사장님이 아니라 책을 아주 사랑하는 열혈 독자 였구나 라는 상상의 시작. 그 상상을 최초로 틔우게 한 뜨거운 문장들. 3 책을 오래 읽다보면 책의 내용보다 책 자체를 대상화해서 감상하게 될 때가 있다. 책의 줄거리에 대한 감상이 일반적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를 따라가는 행위, 책장을 넘기는 행위, 더나아가 독서 행위 에 대한 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문장에 강한 끌림을 느끼면 두세번 반복해서 읽거나 따로 필사를 해두거나 하게 되는데, 그런 문장을 여러개 만나게 될 때-꼭 한 권 내에서가 아니더라도-이제는 각각의 문장들이 지시하는 내용보다는 문장 읽기 라는 행위에 탐닉하는 것이다. <책등에 베이다>에서는 이와 비슷한 다양한 상황들을 볼 수 있는데, 낭독에 대한 낭만 이나 이해하지 않는 읽기 , 관용구의 마취 , 책을 만지는 감동 등과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독서가 인류에게 해로운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외로움을 정당화한다. 더 오래 홀로 있게 한다. 나는 그 해로움을 사랑한다. 읽는 속도도 내가 정해야 한다. 책장도 내가 넘겨야 한다. 책상 위에 놓고 읽을 것이 아니라면 양손을 다 써야 한다. 당연히 한 손만 써서 책을 볼 수도 있지만 당신이 한 쪽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다른 손으로 책 중앙을 붙잡고 서 있다면 어흠, 바로 이 내가 책을 읽고 있소 처럼 보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바로 그 매체를 붙잡고 있다. 시작하거나 중단하거나 조율한다. 그때마다 행동과 촉감이 따라붙는다. 나는 책을 보면서 동시에 책을 만진다. 그때, 책을 읽어서 받는 감동과 무관하게 책을 만져서 받는 감동이 생긴다.-이로, 『책등에 베이다』, 이봄, 131쪽. 책을 어느정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변태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마치 책이 삶의 중심부에 놓여 있고 정작 자기자신은 그 주변부를 맴도는 것 같은 인생이니까. 나 역시 책에 대한 애정이 강하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와 그의 인생에 매혹을 느낀다. 허나 책에 그 정도의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이 정도의 가치를 두는 어떤 대상이 있지 않을까. 옛날엔 책을 별로 안 읽는 사람을 보면 뭔가 답답했는데 이젠 그것이 꼭 책 의 모양새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소중하고, 누군가에게는 사람이 소중하고, 누군가에겐 드라마가 소중하고, 누군가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소중하듯이. 그 소중함을 헤아릴 의지가 있다면, 책의 소중함을 말하는 이 책을 한번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소중함을 기록한다는 것은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4 이번에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적어도 읽은 책에 대해 쓰는 글만큼은 나를 개입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었다. 자의식이 과하게 반영되면 쓰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부담을 느끼기 마련이다보니

저자는 서교동에서 작은 책방 유어마인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책들의 충실한 독자이기도 했다. 훌륭한 독자가 저자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손쉬운 예상마저 보기 좋게 배신한다. 저자는 오히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 에서 이야기한 작가의 죽음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는 말에 충실하다. 저자는 롤랑 바르트의 말에 기대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주 훌륭한 독자의 탄생을 목격하게 된다. 독자의 탄생은 책에서 저자가 아닌 텍스트만 따로 떼어와 자기 식으로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상상을 그동안 위안의 도구로만 삼거나 리뷰라는 형식을 통해 지식 권력을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의 저자는 자기만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이다. 진정한 독자의 탄생이다.

저자소개

무명의 쓰는 사람. ‘그래서요’와 ‘그러게요’의 세계에 산다. 짧은 분량의 작품들, 3분 30초의 음악, 90분의 영화, 단편소설과 콩트를 편애한다. 서교동의 책방 유어마인드를 운영하고, 동반자와 지내면서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itisbbang.com your-mind.com twitter@whoisiro

책의 시작
서문 - 책을 핑계로 밤을 건너다

0. 유령의 롱프르

1. 유년기의 술, 시바스 리갈
- 꼬마 니꼴라 3 , 김모세 구성, 이규성 그림

2. 책등, 책의 척추
- 책과 바람난 여자 , 아니 프랑수아

3. 이십대의 스포츠
- 내 여자의 열매 , 한강

4. 작은 집과 독한 술
- 작은 집 , 르 코르뷔지에
- 스트레이트 온 더 락 1 , 후루야 미쓰토시

5. 다 괜찮아 對다 망한다
- 빈방의 빛 , 마크 스트랜드

6. 무국적 칠면조의 밤
- 페가서스 10000마일 , 이영준
-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다 , 루치우스 부르크하르트

7. 폐허 위의 붉은 얼굴
- 트웰브 핑거스(Twelve Fingers: Biography of an Anarchist) , 조 소아레스

8. 낭독
- 캠핑의 즐거움 , 함정혜

9. 마치 우주의 충돌, 마치 지각의 변동
- 독약 , 프랑수아즈 사강 글, 베르나르 뷔페 그림

10.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이 언제입니까
- 조선 기술 , 대한조선학회 편

11. 왜곡과 과장
- 파브르 식물기 , J. H. 파브르

12. 환생의 끝
-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

13. 완전한 자립
- 벽 , 김영글

14. 드라마의 뒷면
-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 라이먼 프랭크 바움

15. 가장 슬픈 노래의 세계
- ‘가난한 사람들’, 김일두
- 카메라 루시다 , 롤랑 바르트
- 쿠이 쿠이(Cui Cui) , 린코 가와우치

16. 책 속에서 발견한 남의 돈
- 시간 상자 , 데이비드 위즈너

17.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소년처럼 웃었네
- 천사여, 고향을 보라(Look Homeward, Angel) , 토마스 울프
-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 토마스 울프

18. 우울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지
-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세스
- 〈인사이드 르윈〉, 코엔 형제

19. 100년 전의 실종
- 생물이 사라진 섬 , 다가와 히데오 글, 마츠오카 다츠히데 그림

20. 발명된 공동체에 쓸쓸히 산다
-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 장 주네

21. 우리는 사실 모두 클리셰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0. 글을 써야겠다
- ‘The Breeze/My Baby Cries’, Kath Bloom/Bill Callahan
- 5년생 , 키오 시모쿠

책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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